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택 영아 청부납치 모친 살해사건 (문단 편집) == 사건 경위 == 김모 씨(당시 38세)는 1990년에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나, 13년이 지난 2003년을 전후로 남편과 잦은 불화를 겪기 시작했다. 가정 생활에 대한 불만과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김씨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[[나이트클럽]]에 드나들게 되고, 그곳에서 5세 연하의 최모 씨(당시 33세, 화물차 운전기사)를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. 최씨는 상당한 재력가의 아들이었고, 이에 매력을 느낀 김씨는 가출하여 최씨와 [[동거]]에 들어갔지만,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온갖 거짓말을 한 끝에 최씨의 아이를 [[임신]]했다는 말로 결혼을 요구하기에 이른다.[* 최씨의 어머니는 당초 김씨가 아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결혼을 극구 반대했으나, 김씨가 임신했다고 하자 결혼을 허락했다. 최씨의 집안이 워낙 손이 귀한 집이었기 때문에 임신했다는 말 한 마디로 태도가 바뀐 것.] 하지만 김씨는 그 당시 이미 [[불임|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]]이었고, 이를 알고 있었던 그녀는 [[미혼모]] 보호시설 등에서 아이를 데려오려고 하였다. 하지만 보호시설에서도 몇 차례 거절당하자, 급기야 [[심부름센터]]를 찾아가 직원 정모 씨에게 착수금 4,000만원[* 최씨 집에서 준 출산경비였다.]을 주며 '''[[신생아]]를 구해 달라'''고 의뢰했다. 그리고 "성공할 경우 추가로 3,000만원을 더 주겠다"는 조건을 덧붙이자, 당시 사업 실패 및 [[도박]]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정씨는 김씨의 의뢰를 수락했다. 이후 김씨와 최씨는 2003년 11월에 결혼식을 올렸다. 하지만 김씨는 남편과 [[이혼]]하지 않은 상태였고, 언제 거짓말이 탄로날지 몰라 초조해진 김씨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[[혼인신고]]도 미루고 [[출산]]에 대해서도 '[[원정출산|미국에 가서 아이를 낳아]] 함께 돌아오겠다'며 의심을 피했다. 거짓말만 한 것이 아니라, [[미국]]에 간다고 말해놓고 수도권의 모처에서 몇 달 동안 연락을 끊고 잠적하는 치밀한 면모도 보였다.[* 당시 [[나이트클럽]]에서 최씨를 처음 만났을 때 김씨는 "내 직업은 영어강사이며 가족은 전부 [[미국]]에 있다"고 했으나 이는 모두 거짓말이었으며, 결혼식날 미국에서 왔다던 가족 및 친지들은 전부 가족 대행을 해주는 사람들이었다.] 한편 김씨의 의뢰로 [[신생아]]를 찾던 [[심부름센터]] 직원 정씨는 비슷한 처지였던 자신의 처남과 친구까지 끌어들여[* 정씨는 아내와 이혼한 뒤 혼자서 아이를 양육하고 있었으며, 이들도 경제적으로 형편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, 정씨는 "큰 돈을 벌 수 있다"는 말로 이들을 비교적 쉽게 범행에 끌어들였다.] 어떻게든 신생아를 구하려 했지만 6개월이 지나도록 김씨가 원하는 아이를 찾지 못하자 안달이 난 이들은 결국 아기를 납치하기로 마음먹는다. 그리고 2004년 5월 24일 이들은 [[경기도]] [[평택시]] 포승면의 한 주택가 인근에서 범행을 모의하던 중 우연히 생후 70일이 된 아들을 안고 걸어가던 고모 씨(당시 21세)를 발견, 고씨를 미행하다 차량 2대로 좁은 도로를 막아선 뒤 저항하는 고씨와 아기를 차 안으로 밀어넣어 납치했다. 이후 이들은 아이를 돌려달라고 애원하며 저항하는 고씨를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[[강원도 고성군]]의 한 야산에 [[암매장]]한 뒤, 정씨가 아이의 삼촌으로 위장하여 아기를 김씨에게 넘겼다. 하지만 정씨 일당은 아이를 넘겨준 이후에도 김씨를 찾아가 "돈을 더 주지 않으면 남편(최씨)에게 사실을 전부 털어놓겠다"며 협박, 5회에 걸쳐 총 1억 4천만원을 갈취했다. 한편 살해당한 고씨의 시신은 6월 15일 오후 1시경 [[미시령]]에서 온몸이 묶인 채 마대자루에 들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. 그러나 불운하게도 이 사건은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. 당시 매우 큰 사건들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시기였기 때문. 엄마와 아기가 실종된 2004년 5월에는 [[노무현 대통령 탄핵]]이, 시체가 발견된 6월에는 [[김선일(1970)|김선일]] 납치 살해 사건이 있었다. 사건 발생 7개월 후인 2005년 1월 22일 [[서울시]] 강남구 삼성동에서 순찰 중이던 경찰이 [[뺑소니]] 사고 혐의로 수배중이던 정씨의 차량을 발견, 경찰차를 보고 당황한 운전자의 태도와 차에 흙이 묻어있는 걸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검문을 시도했으나, 정씨는 이에 불응하여 도주했다.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은 추적 끝에 정씨 일당을 검거, 조사하던 중 차량 안에서 배터리가 없는 휴대전화를 발견하고 출처를 추궁했으나 이들은 "길에서 주웠다", "차를 살 때부터 안에 있었다"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만을 반복할 뿐이었다. 이들의 이런 태도와 흙투성이가 된 차체, 트렁크에 [[삽]]과 장갑 등이 아무렇게나 흩어진 점 등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휴대전화의 배터리를 마련하여 가장 마지막에 연락한 번호로 연락을 하자, 받은 사람은 고씨의 친구였다. 돌아온 말은 '''"내 친구가 7개월 전에 살해당했는데, 당신들은 어째서 그 번호를 사용하고 있느냐"'''는 대답. 이로서 핸드폰이 고씨의 것임이 확인되었고, 경찰의 추궁 끝에 정씨 일당은 결국 범행을 자백했다.[* 당시 심문 중이던 경찰의 말로는 이들에게 일부러 친절하게 대해 구슬린 뒤, 정씨가 이혼한 홀아비라는 것을 알자 "아이 아버지 주제에 어떻게 아기를 죽일 수 있느냐"며 강하게 나왔고, 정씨는 유도심문에 걸려 실수로 '''"아니다, 아이는 안 죽였다"'''고 실언을 하였다고 한다.] 결국 사건을 맡은 서울강남경찰서 강력5반은 23일 새벽 아기의 안전을 고려, 철저한 보안체제 속에서 김씨의 집을 급습했다. 다행히도 경찰의 우려와는 달리 아기는 무사했고, 신생아에게 필요한 모든 [[예방접종]]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, 김씨의 집에 있던 유아용품들은 하나같이 고가의 유명 브랜드 제품뿐이었다. 김씨는 경찰에 연행되었고, 아기는 경찰의 인도 하에 친부에게 돌아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